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추억의 대상이면서 극복의 대상이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않는 이는 피터 팬이 되지만, 대개는 극복하고 변화해 간다. 그래서 어린 날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타임 라인은 누구에게나 장엄한 성장 소설이다.
『말테의 수기』 역시 성장 소설로 볼 수 있다. 성장 소설은 한 자아가 어떻게 자아의 세계를 완성해 가는가를 그리는 소설로 릴케가 흠모해 마지 않던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가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괴테의 것은 빌헬름 마이스터가 겪는 서사로 그, 혹은 괴테 자신의 성장을 이야기하지만, 릴케는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청년 말테의 일기로 그의 성장한 내면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마치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내밀한 일기장처럼.
어린 시절 올스가르드의 어두운 밤, 말테는 방에서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때의 말테에게 유리창은 밖으로 향하는 통로가 아니었다. 유리창은 거울처럼 방안에 머물러 있는 자신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었다. 여기서의 거울은 성찰의 매체가 아니다. 외부와 단절시키는 벽의 기능만 할 뿐이었다. 청년이 되어 쓴 일기에 나온 대로 벽 속에 갇힌 그의 어린 시절은 죽음과 관련된 일들이 대부분이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억, 죽은 자와 해후하는 것 등이 그러했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이 죽음과 공포와 불안으로 점철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어린이들의 대표적인 놀이인 벽장 속에서의 변신놀이 등도 죽은 자들의 가면과 옷으로 하지 않았던가.
이런 그가 사랑했던 이는 막내 이모 아멜로네였다. 말테의 회상에 따르면 자신은 유리창으로 벽 속에 갇힌 자신만을 보지만 아멜로네는 유리창을 통해 별을 보고 있었다. 또 아멜로네를 연상시키는 유니콘 카페트의 여인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거울로 자신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각수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다고 했다. 즉 그녀는 말테에게 있어 아벨로네는 유년 시절의 정신적 혼란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리고 말테를 성장시키는 인도자였다.
말테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파리 시절은 유년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몸부림 그 자체였다. 그가 보는 파리는 죽음이 빚어내는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 아니었던가. 그는 그것들이 지닌 불안과 공포 너머의 의미를 보고자 했고, 기어코 보고야 만다.
말테는 그 시절을 탕아의 시대로 비유하고 있다.
말테의 어린 시절은 베네치아의 한 여자가 부르는 노래말 "요람을 흔들듯"에 압축되어 있다. 편안해야 할 요람이 아이를 불안스럽게 만든다는 의미이리라. 그래서 그는 집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사랑 받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미래가 추억처럼 막연해지는 것에 벗어나기 위해 과거를 성찰하고 다시 체험하러 파리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는 말테는 "돌아온 탕아"가 된다.
이제 말테는 사랑하는 존재이다. 상대의 반응, 응답과는 무관하게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존재이다. 상대를 꼭 껴안아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포옹의 참담한 슬픔"을 더 이상 겪지 않고, 대상과의 "먼거리에 익숙해져 있"으면서 대상을 초월하는 완성의 형태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여인과의 사랑에서 "내가 사랑하는 만큼 그에게 마음을 달"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했다. 스피노자도 "신을 아무리 사랑해도 신도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테는, 즉 릴케는 신을 사랑했지만 신으로부터 무엇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신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나를 아프게 하는 과거를 성찰하여 다시 체험함으로 '오래된 미래'와 같이 기시감을 걷어버리고 새로운 나를 만나는 그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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